나의 이야기

모과의 향기

채희성 2022. 11. 17. 20:25

모과의 향기

 

주택 담장 너머로까지 주렁주렁 달린 모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네요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고 하지만 노랗게 익어가는 빛깔엔

누구든 현혹 되지요

그래서 그런가 꽃말이 유혹이네요

 

늦 봄 피는 모과 꽃이 또 얼마나 예쁜지 아세요

 

엔목련 홍단풍 소나무와 더불어 담쟁이가 담이며 대문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다 뉘 댁인지 늘 대문은 닫혀 있고

 

언젠가 문경새재 옛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모과가 무수히 떨어져 있어요

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줍는이도 없구나

썰어 말려 모과청으로 겨우네 즐깁니다

산중 모과는 벌레먹거나 못생긴게 많은데

집안에 있는 모과는 인물도 좋다고 누가 그러네요

 

모과 하나 둘 바구니에 담아 차안이나 방에 두지 않은 집이 없었지요

옛날 차량의 필수품 방향제 모과

 

꾸미거나 포장하지 않아도 저절로 풍겨져 나오는 향기

은은한 모과향 그 향기 품어서

누군가에게 은은한 향기 나는 사람으로 기억 되면 좋겠다

 

좋은 향기 물들이고

좋은 향기에 물들여 지자.

*

*

박선영님의 글 한토막 훔쳐왔습니다

 

박선영 교수의 페이스북 글입니다.
......
오늘 내가 기쁜 두번째 이유.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에 대한 얘기는 아주 여러 번 이곳, 페북에 썼다.
그의 부인 한묘숙 여사 얘기까지 포함해서 꽤 여러번 썼다.

6.25때 참전한 미군 장성.
그는 당시에 군수사령관이었다.
1952년 11월 27일, 
부산역 부근에 큰 불이 났다.

판자집도 변변히 없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역 건물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잠자리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됐다.
입을 옷은커녕 먹을 것도 없었다.

이때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열어
군용담요와 군복, 
먹을 것 등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이 일로 위트컴 장군은 
연방 의회의 청문회에 불려갔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한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 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것입니다"
라고 답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뒤 장군은 전쟁이 끝나고도 돌아가지 않고,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대통령한테 돌려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 세워달라'고 청했다.
부산대학이 설립된 배경이다.
그러나 부산대 학생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이런 사실을 거의 모른다.

그리고 장군은 메리놀 병원을 세웠다. 병원기금 마련을 위해 그는 갓에 도포를 걸치고 이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고 쑤근댔지만 개의치않았다.

전쟁 기간 틈틈히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고아원을 지극정성으로 운영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위트컴 장군이 전쟁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연유다.

그리고 그는 부인에게 유언했다.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구까지 찾아와 달라'고.
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다. 북한은 장진호 부근에세  길죽길죽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한테로 가져왔고, 한여사는 유골 한 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렇게 북한이 한여사한테 갖다 준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여사가 북한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이다.
한여사는 한때 간첩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다. 
남편만큼이나 강한 여성이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 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승을 떠났다.
UN공원에 묻혀있는 유일한 장군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이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씨도 장군과 합장되어있다.

이런 장군의 동상 하나가 없다.
이땅에는.
부산에도, 서울에도 없다.
전봉준 동상은 있어도.
전태일 기념관은 있어도.

그런데 오늘, 장군이 떠난지 꼭 40년 만에 뜻있는 자들이 모여 위트컴 장군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국가예산 말고,
재벌 팔을 비틀지도 말고,
70여년 전 수혜를 입었던
피난민 3만명, 
딱 그 수만큼
1인당 1만원씩 해서
일단 3억을 마련하기로 했다.

브라보!

민주주의의 생명은 참여다.
보은도 십시일반, 참여해야 한다.
오늘 그 첫 결의를 했다.
1만원의 기적을 이루어보자.

70년전, 전쟁고아들을 살뜰하게 살피던 위트컴 장군을 생각하면서, 메리놀 병원을 세워 병들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손길처럼, 대학을 세워 이땅에 지식인을 키우려던 그 철학으로, 부하의 유골 하나라도 끝까지 송환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각자 내 호주머니에서 1만원씩 내보자.
딱 커피 두 잔 값씩만 내보자.

1만원의 기적이 한국병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설마 이땅에 1만원씩 낼 사람이 30만명도 안 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니 또 내 마음은 두둥실, 하늘을 날 것만 같다.

그리고 내일 대통령은 장군한테 무궁화 훈장을 추서한다.
너무 늦었지만 감사한 일이다.
이래저래 오늘 나는 기쁘다.

팝콘이 탁탁 터지듯이
그렇게 내 온 몸의 세포들이
기쁨에 겨워 꿈틀거린다.
에스프레소 덕분인가?
까뮈 엑스오 덕분인가?

이제 나는 죽어도 
한묘숙 여사를 만나
웃으며 두 손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브라보!
2022.11.17
모과 꽃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모르는 꽃들  (0) 2022.11.23
울산바위와 축음기 박물관  (0) 2022.11.22
감동 얘기  (0) 2022.11.16
철근 철골 콘크리트 건물  (0) 2022.11.15
낙엽을 쓸며..  (0) 2022.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