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일간의 사투, 노 젓는 보트로 태평양 4040㎞

채희성 2014. 8. 10. 17:21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입력 : 2014.08.10 09:56
  • 스크랩 메일 인쇄
  • 글꼴 글꼴 크게 글꼴 작게

친구 죽음 보며 도전하는 삶 살자!
미국 '그레이트퍼시픽레이스'에서 우승한 최준호씨

지난 6월 9일 미국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의 캐너리로 선착장. 몬터레이는 세계 골퍼가 한 번쯤 라운딩을 꿈꾸는 페블비치 골프클럽이 있는 곳이다.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한때 시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제1회 그레이트퍼시픽레이스(Great Pacific Race)가 역사적인 첫 출발을 시작하는 이날 몬터레이의 날씨는 잔뜩 찌푸렸다. ‘그레이트퍼시픽레이스’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노 젓는 보트를 타고 태평양 한가운데의 하와이까지 4040㎞를 달리는 경주. 조류, 바람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5600㎞가 넘는 거리다.

요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대회는 있지만 노를 저어 태평양을 건너는 오션로잉(ocean rowing)은 이 대회가 최초. 1인승, 2인승, 4인승으로 나뉘어 출전하는 대회의 참가자는 모두 13개 팀 34명. 이 중 4인승 부문에는 7개 팀이 출전했다.

7개 팀 중 한 팀은 국적이 각각인 연합국팀. 연합국팀은 네덜란드인 안드레 키어스(43), 영국인 카스파 재퍼(38), 뉴질랜드인 크레이그 해캣(30), 그리고 한국인 최준호(34)씨로 구성됐다. 최준호씨는 전체 참가자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그렇게 연합국팀의 일원으로 최준호씨는 태평양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43일 만인 7월 23일 오후 2시쯤 하와이 오하우섬 와이키키해변에 도착했다. 1등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최준호씨는 어떻게 ‘오션로잉’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을까. 더군다나 그는 지금까지 해양과 관련 없는 일을 해온 사람이다. 외항 선원을 제외한 한국인으로 태평양을 배로 건넌 사람은 극소수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도미(渡美) 유학생 1진이 미군 수송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 적이 있다. 1963년에는 브라질·파라과이 등 남미로 떠난 농업 이민자들이 태평양을 건넜다.
'그레이트퍼시픽레이스'에 참가한 연합국팀이 태평양에서 노를 젓고 있다. 위쪽 사진에 최준호씨가 바우맨을 맡아 이를 악물고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GPR
'그레이트퍼시픽레이스'에 참가한 연합국팀이 태평양에서 노를 젓고 있다. 위쪽 사진에 최준호씨가 바우맨을 맡아 이를 악물고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GPR
최씨는 지난 7월 25일 귀국했다. 그를 7월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2시간 동안 만났다. 오하우섬에 1등으로 도착해 팀원들과 웃으며 찍은 텁수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양 손바닥은 마치 야구선수의 손처럼 온통 물집투성이였다. 43일간의 사투를 증명했다.

2007년 아주대 미디어학과를 졸업한 그는 직장생활 2년과 자영업 2년을 거쳤다. 지금은 서울에 있는 수공예품 업체 온라인 마케팅 매니저로 일한다. 그는 최근 친구들의 잇따른 죽음을 경험했다. 2011년 2명, 2013년 1명. 친하게 지내던 친구 세 명이 한창 나이에 심장마비 등으로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에 빠졌다.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지! 이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지. 나는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인생을 살아야겠다. 도전적인 삶을 살자.’

최씨는 자신이 태어난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1980년 8월 7일. 그는 인터넷으로 신문 1면을 검색했다. 그 날짜에 가장 눈에 띄는 기사는 한국의 20대 청년 2명이 요트로 태평양을 횡단했다는 이야기였다. 20대 한국인이 요트로 태평양 횡단! 이 기사로 인해 감전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만나본 적이 없는 두 청년은 그에게 어떤 바톤을 건네주는 느낌이 들었다. 최준호씨는 고교 시절 학교 대표로 서울시 육상대회에 출전했을 만큼 운동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태평양을 노를 저어 건너가 보자’고 그는 결심했다. 그는 인터넷 검색을 했다. 국내 포털사이트를 아무리 뒤져봐도 관련 자료가 검색되지 않았다. 그는 구글을 검색했다.

“구글에는 ‘오션로잉’ 관련 자료가 많았다. 특히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는 대서양에서 많은 대회를 치렀고 많은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의 기록은 하나도 없었다. 3면이 바다로 되어 있는데,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람으로 도전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내게 도전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와중에 그레이트퍼시픽레이스가 열린다는 것을 알았고, 그 대회 주최자가 크리스 마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지난 2월 크리스 마틴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참가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크리스 마틴에게서 1인승과 2인승은 모두 팀 구성이 끝났으니 4인승의 연합국팀 멤버들에게 한번 물어보라는 답이 왔다. 이미 팀을 이룬 안드레 키어스, 카스파 재퍼, 크레이그 해캣 3인이 OK를 해야만 합류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때부터 그는 키어스, 재퍼, 해캣 3인과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키어스는 정신과병동 간호사가 직업이고 스카이다이빙 강사로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휴가를 이용해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재퍼는 배우 겸 프로듀서로 ‘뱀파이어 다이어리’ 등에 출연한 적이 있다. 해캣은 심해잠수사로 한국 현대그룹과도 일한 경력이 있었다. 해양 관련 경력이 전무했던 그에게 연합국팀의 ‘합류 사인’이 떨어졌다.
지난 6월 9일 몬터레이 캐너리로에서 출발 직전의 연합국팀. 왼쪽 끝 등지고 있는 사람이 최준호씨다./GPR
지난 6월 9일 몬터레이 캐너리로에서 출발 직전의 연합국팀. 왼쪽 끝 등지고 있는 사람이 최준호씨다./GPR
“뉴질랜드 사람인 해캣은 뉴질랜드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해캣은 내가 수도방위사령부 특별경호대 출신이라는 것을 높이 샀고, 키어스는 내가 군복무 시절 공수 훈련을 받았다는 점을 평가했다고 말했다.”

그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비용. 비용은 항공료, 보트 임대, 합숙 기간 숙식비, 식량 등 총 4500만원이 들었다. 보트는 각 팀이 자체적으로 임대 혹은 구입으로 마련하는 게 원칙이었다. 연합국팀은 크리스 마틴에게서 임대를 하기로 했다. 그는 대기업의 후원을 받고 싶었다. 주요 기업에 스폰서 제안서를 제출했다. 대기업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그는 그동안 모아둔 돈과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4500만원을 마련했다.

다른 하나는 대회 주최 측이 요구한 해양생존훈련, VHF라디오 코스, 응급처치 코스, 내비게이션 코스, 선박안전 코스 등 5개 코스 이수였다. 이 대회에는 주최 측의 선박이 따라붙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조난이나 비상상황 시에는 팀에서 자체적으로 단파 라디오로 구조요청을 보내야만 했다.

“해양선진국은 이런 코스가 체계적으로 운영되어 이수하기에 어렵지 않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런 과정을 이수할 교육기관이 열악했다. 나는 크리스 마틴과 계속 협의를 통해 요트면허 등 대부분의 코스를 이수했다. 하지만 선박안전 코스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인증이 필요해 현지에서 따로 인증을 받았다.”

그는 5월 5일 미국 LA로 갔다. LA공항에서 대기 중인 주최 측의 차를 타고 몬터레이로 이동해 합숙장소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1개월 동안 연습에 들어갔다. 해캣과 재퍼는 학창 시절 아마추어 조정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20시간 동안 계속 노를 젓는 훈련, 야간훈련도 마쳤다. 나이도, 직업도, 성장 배경도 다른 네 사람이 이제 한 배에 탄 공동운명체가 되었다.

“가장 어린 해캣과 나이가 많은 키어스는 13살 차가 났지만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성격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트나 보트를 타고 장시간 여행을 한 경험이 없다. 망망대해에서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첫 번째 관심사다. “건식(乾食) 식량인 ‘익스피디션 푸드’를 대회참가 기준인 70일치를 준비했다. 메뉴는 7가지로 1봉지당 800㎉였다. 식량만 1인당 400만원이 들었다. 하루에 한 사람당 4~5봉지를 먹었던 것 같다.”

4인승 로잉 보트는 길이 731㎝(24피트), 폭 182㎝(6피트). 위성전화를 각자 하나씩 준비했다.

“두 명이 노를 저으면 두 사람은 쉬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낮시간에는 한 시간 노를 저으면 한 시간 쉬고, 야간에는 두 시간 노를 젓고 두 시간 쉬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 노를 젓는 두 사람은 또 역할을 어떻게 나눴나.
“한 사람은 바우맨을, 다른 한 사람은 스트로크맨을 맡았다. 스트로크맨(stroke man)은 주어진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노를 젓는 사람이고, 바우맨(bow man)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방위각을 잡으며 노를 젓는 사람을 말한다. 두 사람이 호흡이 잘 맞아야 보트가 똑바른 방향으로 시속 2.4~2.5노트로 진행할 수 있다. 나는 키어스와 한 조였다.”
태평양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연합국팀/GPR
태평양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연합국팀/GPR
그는 키어스와 한 조로 노를 저을 때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키어스는 키 192㎝에 체중이 100㎏이 넘는 거구였다. 우리는 호흡이 잘 맞지 않는 편이었다. 6월 중순 야간 로잉 중에 키어스가 옆으로 푹 하고 쓰러졌다.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3~4일 후에 야간 로잉 중에 또 쓰러졌다. 그는 너무 힘들다고 말했지만 내 눈에는 꾀병을 부리는 것으로 보였다. 이 일로 갈등이 많았다.”

사람은 물만 먹으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여러 날을 버틸 수 있다. 태평양에서는 식수를 어떻게 해결할까.

“자동 워터메이커를 가지고 탔다. 그런데 연습 때 제대로 체크하지 않아 출발 일주일 만에 고장이 나고 말았다. 수동 펌프질을 해서 물을 만들어야 했다. 사람마다 물을 마시는 양도 다르고 물을 만드는 양도 차이가 났다. 특히 키어스가 할당량을 만들지 않아 재퍼와 갈등이 많았다.”

- 보트에서는 용변은 어떻게 해결하나.
“처음엔 고무로 된 통에서 해결하고 바다에 버렸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트 가장자리에 앉아 바다 위에다 그대로 배설했다. 용변을 보고 나면 휴지가 없으니까 바다에 뛰어들어 씻곤 했다. 배가 잠깐 멈추는 시간은 바로 용변을 보고 씻으러 물에 들어갈 때뿐이다.”

- 43일간의 로잉 중에서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나.
“첫주가 가장 힘들었다. 지옥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일주일 동안 용변을 보지 못했다. 태평양 날씨를 하와이 날씨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야간에 날씨가 추워서 아주 힘들었다. 항상 노를 저어야 했으니까 몸이 늘 물에 젖어 있었다. 야간에 잠을 자면 추워서 덜덜덜 이가 떨렸다. 하지만 폭풍우가 치면 속도가 잘 나는 것은 좋았다.”

- 태평양 한가운데서 만나는 밤하늘은 어땠나.
“출발해 일주일 동안은 바람이 불고 날씨가 흐려 햇빛을 보지 못했다. 일주일이 지났을 어느 날 밤, 노를 젓고 있는데 ‘하늘을 쳐다보라’고 했다. 고개를 들었더니, 아 하늘에는 내가 34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별들은 마치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았다. 일주일간의 고통이 싹 사라졌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 캄캄한 밤에 노를 저을 때의 기분은 어떤가.
“나는 주로 바우맨을 했다. 내비게이션의 방향간을 보면서 노를 저었다. 달이 안 뜬 날 바다와 밤하늘의 경계가 없었다. 유일한 불빛인 내비게이션의 방향간만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걸 보면서 노를 젓다 보면 몸도 좌우로 흔들리면서 나도 모르게 정신착란이 일어나곤 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것처럼 바다에서 막 보트에 인어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 언제부터 육지가 그리워졌나.
“둘째 주부터 일종의 정신착란 증세가 나타났다. 자꾸만 육지에 도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지가 너무나 그리웠다.”
지난 7월 23일 하와이에 도착한 연합국팀이 트로피를 들고 웃고 있다. 크레이그 해캣, 카스파 재퍼, 최준호, 안드레 키어스(왼쪽부터)/GPR 
오른쪽 사진은 웃고 있는 최준호씨./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7월 23일 하와이에 도착한 연합국팀이 트로피를 들고 웃고 있다. 크레이그 해캣, 카스파 재퍼, 최준호, 안드레 키어스(왼쪽부터)/GPR 오른쪽 사진은 웃고 있는 최준호씨./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포기하고 싶지 않았나.
“노 젓는 게 너무 힘들어 매일매일 포기하고 싶었다. 키어스는 ‘4000만원 들여 내가 왜 이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해캣이 내가 힘들다고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뉴질랜드 군인은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주었다. 이 말을 듣고는 자존심이 상해 다시는 그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를 저으면서 스스로 뭔가를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국민교육헌장이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수없이 외웠고 그게 힘이 되었다.”

- 상어나 돌고래를 만나지는 못했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용변을 보고 씻으러 수경을 쓰고 물에 들어가곤 했는데, 어쩌다 물고기를 보는 게 전부였다. 하와이에 거의 다 왔을 때 물 위에서 헤엄치는 거북들을 발견한 게 전부다.”

- 야간에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나.
“밤에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바다가 잠잠할 때였다. 이럴 때면 오로지 노의 힘으로만 전진해야 했다. 평균시속 2.4~2.5노트를 달려야 하는데 이런 날은 0.8~1노트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적당한 폭풍우가 있는 게 좋았다. 또 계속 똑같은 자세로 노를 젓다 보니 엉덩이에 종기가 많이 생겨 아팠다. 그래서 엉덩이를 흔들어 주면서 계속 노를 저어야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들은 아예 홀딱 벗고 노를 저었다.”

육지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어땠을까.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오하우섬을 발견했을 때 생각처럼 그렇게 감격스럽지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육지에 도착한다는 정신착란에 사로잡혀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는 오하우섬에 도착해 처음 육지를 밟았을 때 만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의료진은 탈수현상, 피부질환, 저혈압 증세를 제외하고는 건강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출발할 때 78㎏이던 체중이 68㎏이 되었다. 연합국팀은 모두 새카맣게 그을린 텁수룩한 얼굴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태평양을 노를 저어 건넌 최초의 아시아인 최준호. 그는 43일간의 사투(死鬪)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새로운 인생을 살다온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내가 그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던 게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누가 물어본다면 기꺼이 도전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사람은 태어날 때 축하를 받고 죽을 때 슬퍼한다. 하지만 오션로잉은 출발할 때는 걱정하지만 도착하면 기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