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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와 두 일본인

채희성 2015. 5. 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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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데스크] 스티브 잡스와 두 일본인
기사입력 2015.05.03 19:55:31 | 최종수정 2015.05.03 23:4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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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1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 결혼식장. 웨딩마치 대신 풍경, 목탁 소리와 향연이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신랑 스티브와 신부 로렌 파월이 혼인서약을 했다. 신랑 신부의 성(姓)은 잡스. 주례는 선불교 선사인 일본인 오토가와 고분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히피 생활을 하던 1975년 샌프란시스코 인근 하이쿠 선원의 `선(禪)` 수행 지도자인 고분 선사와 만났고 2002년 선사가 사망할 때까지 영적 스승으로 모셨다. 고분은 당시 선불교 승려가 되려던 잡스에게 "사업과 구도(求道)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말해 애플 창업을 결심하게 했다.

잡스뿐 아니라 많은 히피들이 일본 선불교에 빠져들었다. 애플에서 쫓겨난 잡스를 재기하게 해 준 훗날의 픽사를 조지 루카스가 시세의 3분의 1 가격에 넘겨준 것도 `선`에 대한 공통의 관심이 계기였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작동되는 아이팟, 아이폰의 심플하고 직관적인 디자인 콘셉트는 잡스가 평생 수행해 온 선불교적 명상과 직지(直指) 사상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있다.

 

스티브 잡스(오른쪽)와 로렌 파월의 결혼식. 왼쪽이 주례를 맡은 일본인 오토가와 고분 선사.
또 한 명의 일본인이 있다. 스탠퍼드대를 나와 UCLA에서 MBA를 마친 가이 가와사키는 매킨토시에 매료돼 창업 초기 애플에 입사한 뒤 에반젤리즘(evangelism) 마케팅을 창안했다. 그는 애플 제품을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매혹과 숭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애플 컬트(apple cult)라는 경이로운 현상을 만들었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기업 애플의 성공사에는 일본인의 족적이 깊게 파여 있다.

매년 4월 워싱턴 포토맥 강변을 시작으로 미 전역에서 화려하게 펼쳐지는 벚꽃축제는 음식, 공연과 어우러지며 일본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선불교는 그에 앞서 IT혁명 여명기인 1970년대 선풍을 일으킨 히피 문화와 호흡하면서 미국인의 정서에 파고들어 오랫동안 발효됐다.

일본은 미국의 문화적 일상뿐 아니라 종교적, 영적 사상으로도 스며들었다.

일본은 미국에 뿌리내린 스피리추얼 파워(spiritual power)를 우호적 대일(對日) 인식의 지렛대로 십분 활용해 왔을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로 공식화된 미·일 신동맹이 동북아 정세를 뒤흔들고 있다.

우리 정부 외교의 총체적 실패라는 자책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미·일 밀월 시대가 단순히 외교적 물량 공세의 결과물이거나 양국의 전략적 타산일 뿐이라는 진단은 피상적이다.

우리에게도 일본의 선불교가 미국에 미친 것과 같은 스피리추얼 파워가 있을까. 미국에는 몰라도 일본에 미친 것은 있다. 17세기 이후 일본 지도층에 광범위한 열풍을 일으킨 퇴계 사상이다.

메이지유신의 법령 1호가 `퇴계 사상으로 국민을 교육하라`였다. 퇴계의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은 나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일본인의 공공정신이 됐다(허만성 저 `한국, 한국인 무엇이 문제인가` 중).

천원권 지폐의 퇴계 표준 영정은 에도 시대 일본 유학자가 꿈에서 뵈었다며 그린 초상화가 밑그림이다.

미·일 신동맹 이후 한·미 관계와 악화일로인 한·일 관계 재정립은 일본의 과거사 사죄와 독도 영유권에 대한 태도 변화가 선행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렵다. 마치 덫에 걸린 형국이다. 유체이탈을 시도하는 일본에 속히 덫을 풀라고 압박하고 성토하는 것만 능사일까.

일본이 미국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가진 스피리추얼 파워로 일본인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볼 수 없을까.

주자학 본산인 중국을 포함해 35개국에 국제학회를 결성시킨 퇴계 사상 열풍을 다시 한번 일으킬 수 있다면 일본 내 지한(知韓) 양심 세력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탈된 일본 양심을 불러들여 이성적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을지 모른다. 그걸 정부가 해낼 것 같지는 않다. 문화 예술계와 학계를 망라한 지식인들이 함께 지혜를 모아볼 일이다.

[이창훈 오피니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