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마라톤을 ‘노력한 만큼 얻는 정직한 스포츠’라고 말한다. 사실 스포츠는 종목을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다 정직하다. 노력한 것 이상으로 얻을 수 없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에 매료되는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노력과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불운 때문에 실력만큼 빛나지 못하는 스포츠 스타들이 종종 있다. 마라톤에서는 100년 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도란도 피에트리가 그런 선수다.
마라톤의 역사를 말할 때 1908년 런던올림픽이 기준이 된다. 42.195km 길이의 코스가 처음 도입된 대회이기 때문이다. 마라톤 종목은 제8회 파리올림픽 전까지 7번의 올림픽에서 서로 다른 거리가 사용됐다. 당시만 해도 마라톤은 기록을 다투는 경기가 아니라 거리에 ‘도전하는’ 경기였다. 때문에 주최 측의 판단 여하에 따라 40km 내외 거리를 선택했다. 마라톤 전쟁에서 필리피데스가 달린 거리를 어떻게 예측하느냐에 따라 거리가 바뀌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마라톤 거리를 공식적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고, 1921년 국제육상경기연맹이 1908런던올림픽에서 사용한 42.195km를 정식 거리로 채택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런던올림픽이 계측하기도 힘든 42.195km를 택하게 된 데는 웃지 못 할 사정이 있다.
원래는 42km로 치를 작정이었지만 영국 왕실에서 선수들이 윈저궁전 앞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부당한’ 요구를 하는 바람에 졸지에 195m가 늘어난 것이다. 런던올림픽 우승자 존 헤이즈는(John Hayes) 정치권의 적절치 못한 압력 덕분에 세계 최초의 마라톤 세계기록 작성자가 된 셈이다. 마라톤 거리가 처음부터 42.195km로 정해졌다면 1회 대회에서 3시간대 기록으로 우승한 그리스 양치기 스피리돈 루이스(Spyridon Louis)가 차지했을 영예다.
세계 마라톤 역사상 가장 억울한 남자?
하지만 그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있었으니, 존 헤이즈를 시종일관 압도하며 1위로 골인하고도 실격을 당한 이탈리아의 도란도 피에트리(Dorando Pietri)다. 22세 젊은 나이로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도란도는 압도적인 스피드로 선두를 달리며 결승점이 있는 화이트 시티 스타디움으로 들어왔다. 이때까지 사람들은 도란도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2위 존 헤이즈(2:55:19)보다 1분 이상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체력을 소진한 그는 결승점을 270m 정도 앞두고 다리가 풀려 쓰러졌다. 곧 다시 일어나 달렸지만 무려 5번이나 쓰러지며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보다 못 한 심판들은 그를 양쪽에서 부축해 일으켰고,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거들어주었다. 당시 현지 언론은 ‘그는 경주로를 따라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발을 놀렸다. 그의 발걸음은 걷는 것도 아니었고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허우적댈 뿐이었다.’ 라고 묘사했으니 얼마나 극한의 레이스를 펼쳤는지 짐작할 만하다.
100년이 넘은 경기인지라 골인 과정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도 있다. 도란도가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방향감각을 잃고 반대 방향으로 달리려고 하여 심판이 개입했다는 설도 있고, 도란도를 부축한 것이 심판이 아니라 뒤따라오던 존 헤이즈라는 설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낭설인 듯하다. 당시 결승점 사진에 두 명의 심판이 함께 골인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물론 중요한 것은 1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한 도란도가 ‘외부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실격 처리되면서 금메달이 2위로 골인한 존 헤이즈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이 경기는 이후 ‘도란도의 비극’으로 불리며 마라톤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명장면으로 여겨지고 있다.
‘도란도의 비극’ 혹은 ‘이탈리아의 비극’
헤이즈가 도란도를 부축했다는 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도란도의 ‘반칙행위’를 문제삼은 것이 헤이즈 측이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항의를 받자 도란도를 부축했던 심판들은 그의 실격을 선언했다. 도란도는 대회 심판들이 선수가 원치 않는 도움을 주고는 메달까지 빼앗아 갔다며 창문을 부수는 등 극렬하게 항의했다.
주최 측이 고심에 빠졌음은 당연했다. 비록 수많은 관중들의 요구에 의해 도란도를 부축한 것이지만 실격에 행당되는 행위를 심판 스스로 자행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심판 중에는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코난 도일도 속해 있어서 심판진의 전문성도 의심해볼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제4회 런던올림픽은 총체적으로 판정 논란에 휩싸인 대회였다. 통상 올림픽 경기에서 심판단은 각국 출신의 심판을 고루 기용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런던올림픽은 주최국인 영국의 심판만으로 심판단을 구성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체조에서 프랑스(5위)에 불리한 판정이 적용됐다는 주장이 나왔고, 사이클 경기에서는 프랑스 선수가 영국 선수를 제치고 우승하자 경기 자체를 이유 없이 무효 처리해버렸다. 육상 400m 경기에서도 미국 선수가 우승하자 영국 선수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재경기를 치렀다(미국 선수들의 보이콧으로 영국 선수가 혼자 출전해 우승).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라톤 경기에서의 실수도 아일랜드 출신 미국인 존 헤이즈를 우승시키기 위한 것 아니었냐는 의혹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관중들은 도란도 피에트리가 진정한 우승자라며 추켜세웠다.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런던올림픽의 편파판정 의혹과 도란도의 비극적 패배를 크게 다뤘다. 결국 영국 왕실은 도란도를 달래기 위해 별도로 제작한 황금 트로피를 수여했다.
도란도 피에트리는 이후 올림픽 금메달를 목에 걸지도, 세계 최고기록을 수립하지도 못했다. 결국 런던올림픽이 마라토너로서 가장 귀중한 기회였던 셈이다. 또한 지금까지 이탈리아 국적의 선수가 세계최고기록을 수립한 적도 없으니 도란도의 비극은 이탈리아의 비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헤이즈에 설욕하고 당대 최고 러너로
도란도 개인에게는 비극적인 올림픽이었지만, 이 드라마틱한 경기는 전 세계 스포츠 팬들의 관심을 마라톤으로 끌어 모으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경기 직후 병원으로 실려 갈만큼 전력을 다한 도란도와 다소 늦었지만 페이스 조절을 잘 해서 정상적으로 골인한 헤이즈 중 누가 진정한 1인자인지 알고 싶어 했다.
재대결은 불과 4개월 후인 1908년 11월에 성사됐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마라톤대회가 아니라 미국 뉴욕의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펼쳐진 실내경기였다. 관중들은 저마다 응원하는 선수에게 돈을 걸었고, 도란도와 헤이즈 두 선수는 트랙을 무려 250바퀴나 돌며 진검승부를 벌였다. 결과는 도란도의 승리. 올림픽 당시보다 훨씬 뛰어난 2시간 44분 20초로 우승을 차지했고, 헤이즈는 2시간 45분 05초로 뒤를 이었다.
이 대회는 공식 기록을 인정받지 못하는 대회였던 듯하다. 마라톤 세계기록 변천사 자료를 보면 이후 3차례 경신된 세계기록(1909년)이 도란도의 1908년 기록보다 저조한 2시간 46분대에 머물고 있다. 물론 1909년 한 해에만 5차례나 세계기록이 경신되어 8월에 이미 2시간 40분 35초로 수준이 격상됐다.
도란도는 이후에도 미국 각지를 돌며 몇 주에 한 번씩 마라톤 경기를 벌였으며, 헤이즈와 맞붙을 때마다 승리해 당대 최고의 러너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앙리에게 패배한 이후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결국 마라톤 세계기록 작성이나 올림픽 금메달 획득에 끝내 실패함으로써 마라톤사에는 ‘비극의 주인공’으로만 남게 되었다.
Copyrights ⓒ 클럽마라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