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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대한민국,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채희성 2010. 7. 2. 09:30
사설·칼럼
강천석 칼럼

[강천석 칼럼] 대한민국,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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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7.01 19:09 / 수정 : 2010.07.02 03:22

강천석 주필

하류가 먼저 썩어상류 오염시킨 江은 없다
상대 野心보다 이쪽 放心이 위기 불러온다

우리는 지금껏 살아온 세월의 길이만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남은 시간만큼 내다보는 것일까. 그 정답이 무엇이건 간에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을 것이 분명한 나 같은 세대는 요즘 나라의 장래와 관련한 상서롭지 못한 예감(豫感)에 몸을 뒤척이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역사를 돌아봐도, 신문을 펼쳐도 이 어둠침침한 그림자가 뒤에 따라붙는 듯하다.

"올해 가장 웃기는 사건은 미국 해군이 너를 데려간 일이다. 세상에 멀쩡한 놈이 쌔고 쌨는데 어쩌자고 해군은 너 같은 놈을…." 1941년 가을 어느 하버드 법과대학원 학생은 친구가 군대에 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편지를 띄웠다. 사실 그 친구는 척추부터 창자까지 성한 데가 없었다. 그해 육군장교 후보생 시험, 해군장교 후보생 시험에서 잇따라 쓴맛을 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국 친구는 억만장자 아버지에게 애절한 편지를 썼고, 아버지는 정계와 군(軍)의 인맥을 움직여 아들을 해군에 집어넣었다. 부자(父子)를 묶어준 끈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국민 대열(隊列)에서 낙오하게 되면 장래 나라의 주요 공직을 맡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절박감이었다. 이렇게 해군에 들어가 훗날 남태평양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그는 평생 진통제와 각성제의 힘을 번갈아 빌려가며 통증에 맞서야 했다. 케네디 대통령 이야기다.

시사 만화가들은 미국의 6·25 참전 결정을 내린 트루먼 대통령을 그릴 때면 코에 걸린 두툼한 안경부터 먼저 그려넣었다. 트루먼은 안경이 없으면 장님과 마찬가지인 지독한 근시였다. 그런 그가 1차 세계대전 당시 포병 대위로 프랑스 전선을 누빌 수 있었던 것은 시력검사표를 달달 외워서 신체검사를 통과한 덕분이다. 케네디와 트루먼의 이야기는 어수룩하게 보이는 미국이 사실은 무서운 나라라는 것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1916년 6월 영국군은 프랑스 북부 솜강(江) 지역 전투에 25개 사단을 투입했다. 돌격 명령과 함께 영국 젊은 병사들은 40㎏ 가까운 군장(軍裝)을 짊어지고 독일군 기관총 총구(銃口)를 향해 온몸을 드러낸 채 진흙탕을 달려나갔다. 소대와 분대의 앞장을 선 것은 귀족 또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젊은 소위들이었다. 전투 첫날 7만여명의 영국군이 전사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50년대 차례로 영국 총리를 지낸 애트리·이든·맥밀런은 지옥과 같은 이런 전투의 생존자들이었다. 세 사람은 전쟁이 끝나고 대학에 복학(復學)했으나 함께 전쟁에 나갔던 학우(學友)의 3분의 1은 끝내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50세 이하 영국 귀족의 20%가 1차 대전에서 전사했다. 귀족과 명문대학 출신의 전사자 비율은 노동자·농민보다 몇배 높았다.

2차 대전 말기 할복(割腹) 자결과 전투기와 함께 적(敵) 군함에 충돌하는 모습으로 용맹무쌍하다는 신화를 만들었던 일본 귀족과 제국대학 출신의 전사자 비율은 1·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귀족과 옥스퍼드·케임브리지 출신 전사자 비율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낮았다. 종전(終戰) 후 이 같은 통계숫자를 확인한 일본 역사가들은 2차 대전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고 일본은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고 실토(實吐)했다.

상대의 야심(野心) 탓만으로 존망(存亡)의 위기에 몰렸던 나라는 드물다. 이쪽의 방심(放心)이 상대의 야심에 맞장구를 쳐줘야 한다. 천안함 폭침 이후 합동조사단의 발표를 둘러싸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준 미달의 논란, 비상근무 중인데도 퇴근만 하면 술집으로 달려간다는 일부 군 초급 간부들에 관한 믿어지지 않는 뒷소문, 생각이 여물지 못한 일부 병사들이 '전쟁이 날지 모른다'며 울먹였다는 이야기는 나라의 밑이 꺼지고 있는 조짐이다.

대한민국은 휴전선 248㎞를 따라 김정일의 200만 군대와 대치하고 있는 나라다. 어느 누구도 그런 이 나라의 입법·사법·행정부 요인, 특히 여·야 국회의원들의 군 면제자 비율을 아랍 속의 고도(孤島) 이스라엘과 견줘 보려고도 한 적이 없다.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대학교수, 최고경영자, 정상급 연예인 등 다른 잘나가는 직종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민주 투사까지 제 몸에 일부러 상처를 내 병역 의무를 피해갔다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하류(下流)가 먼저 썩어 오염이 상류(上流)로 번져간 사례는 역사에 없다. 대한민국을 나라다운 나라로 다시 세우려면 이 나라의 '위'와 '아래' 어느 쪽부터 손을 대야 할지는 너무도 자명(自明)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