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창규 삼성전자 고문
깐깐하고 괴팍한 스티브 잡스와 담판을 벌였다.
애플의 제품에 우리 메모리를 독점 공급하기로 합의 했다…
한국산 제품이 세계시장에 팔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청년 세대가 있다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
1975년 봄, 광화문 서점에서 우연히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고체 물리학에 매료되어 있었던 내게 앤디 그로브(Andy Grove·인텔의 창업자)라는 저자명이 박힌 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명은 '반도체 기술과 물리학'. 막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처럼 어슴푸레했던 내 머릿속을 환히 비춰줄 것만 같았다. 수십 번을 읽은 그 책이 내 손에서 떨어져 나갔을 무렵, 나는 이미 반도체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다.그 후 30년 뒤인 2005년, 나는 깐깐하고 괴팍하기로 소문난 애플 CEO 스티브 잡스와 마주앉았다. 당시 그는 MP3플레이어 '아이팟'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저장장치인 하드디스크의 단점, 즉 배터리 소모가 많고 충격에 약하다는 점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애플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주머니 속에 깊숙이 감춘 채 그를 만났다. 비장의 카드는 삼성전자가 개발한 고용량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였다. 잡스는 하드디스크보다 훨씬 작고 효율이 높은 새로운 저장장치가 필요했고, 우리는 대량생산을 시작한 플래시 메모리의 세계적 공급처를 찾고 있었다.
기싸움이 10여분 정도 계속됐다. 몇 주 전, 아이패드 출시를 선언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때도 그는 청바지 차림에 격식이 없었고 말과 행동이 직선적이었다. 상대를 앞도하는 그의 눈빛과 자신에 찬 어조는 나를 주눅들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선에서 물러서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뿐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한 시간여의 씨름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 그는 애플의 주력 제품에 한국산 플래시 메모리를 장착했으며 우리가 독점공급하기로 했다. 미국 반도체시장 선점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스티브 잡스는 '융복합(融複合)적 생각'의 화신(化身)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크리스텐센(Christensen) 교수는 "앞으로는 현존하는 기술의 연장선이 아닌 비연속적 성격의 '융복합기술' 이 IT 시대 이후를 책임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스탠퍼드 대학에는 'Y2E2'라는 암호 같은 명칭의 건물이 있다. 지붕부터 지하까지 연결된 중앙 홀구조로 되어 있어 자연 채광을 통한 보온 효과가 이 건물의 전력 수요를 현저히 감소시킨다. 이 건물 주위로 나노·바이오·엔지니어링 등을 연구하는 건물들이 하나의 사이트에 밀집해 있으며, 각 건물이 지하통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효율적인 '융복합'을 위해 건물 설계부터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에 맞게 신경 쓴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도 학제간 연구에 이제 막 눈을 떴다. 대표적인 것이 '자유전공 학부' 제도다. 하지만, 융복합이라는 것이 설계 잘 된 건물이나, '자유전공 학부'의 도입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닐 것이다. 문제는 소프트웨어이며 소프트웨어형 인재다. 우리가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했을 때, 그 후 매년 두 배씩 플래시 메모리 용량을 늘려 세계 반도체 업계를 놀라게 했을 때 우리의 주 무기는 배고픔과 오기였다. 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욕망, 더 이상 강대국에 눌려 살지 말자는 오기가 우리 세대의 최고의 정신적 무기이자 소프트웨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우리로 족하다. 차세대 리더는 스티브 잡스형 인간, 융복합형 인재여야 한다. 우리나라에 그런 청년이 태어나고 있는가? 스티브 잡스가 행한 아이패드 시연식을 마치 오락프로 보듯 그냥 흘려보았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한국산 자동차가, 한국산 원자로가, 한국산 선박이 세계시장에 팔려나가는 것을 현재의 청년 세대가 당연한 눈초리로 보고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지식에 굶주렸던 30년 전의 필자가 반도체에 인생을 걸었듯이, 우리 세대가 만든 경성(硬性) 과학기술에 젊은 세대의 연성(軟性) 혁신이 잘 조화돼 제3세대의 한국산 IT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져야 한다.
단점도 많지만, 우리 세대의 장점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개인적 치부욕이나 출세욕을 버렸었다. 반도체로 세상을 열고자 하는 욕망, 한 가지로 달려왔다. 젊은 세대에게 "내가 미쳐야 남이 행복해진다"고 말하고 싶다. 저기 '창의(創意)의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다. 그곳에 몸을 던질 젊은 과학도들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