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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채희성 2007. 8. 29. 00:59

 

  청계산이나 시민의 숲에 있는 화장실이 모두 이렇게 바꼈으면  좋겠다.(냄새 없고 물을 쓰지 않는 거품 화장실)

 

서양의 화장실 문화

 

 

 

서양은 동양과 분뇨에 대한 관념이 많이 다릅니다.

동양에서는 분뇨를 좋은거름으로 생각하고 활용한 반면 서양에서는

불필요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며 배설과 함께 버렸다고 합니다.

 

 

1만년 전 고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흐르는 물로 분뇨를 해결했는데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조잡하지만 수세식 화장실인 셈이랍니다. 기원전 1700년경에 크레타섬 미노아 왕족은

머리위에 수조를 두고 파이프로 물을 채우고 빼내는 화장실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고대 로마에는 매우 발달한 화장실이 있었는데 수세식 공중화장실이 140여개 넘게

있었다고 하는데사람들은 칸막이 없는 변기에 앉아옆 사람과 정치를 논하거나 저녁 파티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또한 거리 주변에는 '가스트라'라는 분뇨병을 두고 사람들이

아무곳에나 배설하는 것을 방지했답니다. 이 후 로마제국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공중 화장실의 이용료를 받았으며, 공중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렸답니다.

 

 

 

 

 중세유럽은 화장실 문화의 후퇴기였는데 기독교의 금욕사상은 육체의 욕구를 가능한 억제하고자

했으며 전신 목욕 조차 피하는 생각을 낳아 실내 화장실이 점차 사라지는 요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정에서는 대개 야간용 변기를 사용했는데, 안에 담긴 분뇨를 바깥에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답니다.

 따라서 도시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버려진 배설물 때문에 매우 불결했다 합니다.

 

 

르네상스를 지내면서도 사람들은 화장실이나 목욕시설.도구등에 관심을 두지 않아 2 천년 전부터

발달했던 화장실 배관 기술이 궁전에서 조차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답니다.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화장실이 없어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중전 정원에서

실례하는 것이 예사였으니 그 당시 서민들이 사는 도시의 생활은 어떠 했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

 

귀족들은 악취를 감추기 위해 향수를 사용했으며 길거리에 쌓인 분뇨에 옷을 더럽힐까 걱정되어

여성들은 덧신(하이힐)을 신게 되었다고 하고, 신사들은 머리위에서 떨어지는 분뇨를 피하기위해

높은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었으며 , 비교적 분뇨를 덮어 쓸 위험이 적은 길 안쪽으로 여성이 걷게 했답니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위생문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전염병을 몰고 왔습니다.

흑사병은 유럽전역을 휩쓸며 당시 유럽인구의 약 1/3 가량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위생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분뇨를 위생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합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에 수세식 변기를 발명하게 되었고 그 이용이 일반화 되면서

 오늘날과 비슷한 화장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욕조와 세면기 같은 위생기구를 함께 설치하는 형태로 발전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화장실은 주요한 문화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의자변기

 

 

중세 유렵에서 왕실과 귀족들은 요강보다 화려하고 편리한 의자변기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금은을 비롯한 여러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의자 변기는 의자가 아닌 가구의 하나로써

인식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의자변기에 앉아 신하를 맞이하는 왕도 있었으며

그 위에 앉아 식사를 하는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귀족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화려한 의자변기를 가지기 위해 경쟁하는 모습도 나타났을정도 였는데

이러한 의자변기는 점점 발전하여 오늘날 수세식좌면기의 발달을 낳게 하였다고 합니다.

 

 

 

 

 

 

 

세계의 요강 및 관련 도구

 

 

 

 

 

세계의 다양한 요강들.

 

 

 

 

호자: 중국에서 사용했던 소변통 변기(요강)(앞줄 왼쪽)

수병: 일본에서 사용했던 소변용 변기(요강)(앞줄 오른)

 

 

 

 

화장실 용품 세트: 근대 유럽의 화장실에서 쓰여졌던 세변용기들(뒷줄)

볼타르: 서양에서 사용했던 소변용 변기(요강)

환자용 대변기: 병원에서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사용하는 변기.

 

 

 

 

로타: 인도사람들이 용변 후 물을 이용 손으로 뒷처리 할때 사용하는 물그릇

 

 

 

 

대나무 주걱: 용변을 본 후 뒷처리에 사용했다는 도구 (일본)

흙판 닦개: 용변을 본 후 뒷처리에 사용을 했다는 도구 (인도)

 

 

 

 

도기 변기: 19세기 말 유럽에서 사용되던 화려한 변기입니다.

 

 

 

 

참호용 즉석변기: 세계대전 당시 병사들이 사용하던 변기.

 

 

 

요강과 하이힐, 모자, 코트

 

 

중세 유럽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요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밤새 요강에 담겨졌던 분뇨와

오물등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버리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습관이었습니다.

 따라서 창문 아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뜻밖의 분뇨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합니다.

요강을 비우는 사람은 "조심하세요" 라고 짧은 예의를 차리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아래에서 걷는 사람은 재빨리 몸을 움추리고 뛰어야만 했답니다.

 

 버려진 분뇨와 오물은 항상 거리에 쌓여 있었는데, 여성들은 거리를 걸을때 드레스의

끝자락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신발에 나무를 대어 덧신을 신었는데 오늘날 여성패션의

하나인 하이힐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유럽 신사의 상징인 높은 모자와 코트도 마찬가지 입니다.

분뇨 세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머리에는 높은 모자를 쓰게 됐으며

어깨에도 뭔가를 걸치게 된 것이라 하는군요. 

 

 

 

그 밖의 여러가지 화장실 문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의 용변 보는 모습.

 

 

 

 

2층은 고용주가, 1층은 고용인이 쓰던 2층 화장실.

 

 

 

 

우편엽서.

 

 

<2> 한국 화장실 문화의 역사와 특징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
‘뒷간’‘측간’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인의 전통 의식에서 화장실은 멀리 두고 싶은 곳이었다.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농토에 필요한 사람의 배설물을 귀하게 여겼으나, 화장실 자체를 소중히 여기진 않았다. 20세기에 근대화가 진행하면서 도시 인구가 급속히 늘었지만 배설물을 처리하는 공간인 화장실은 턱없이 부족했다. 뿐 만 아니라 대부분 불결했다. 올림픽을 유치한 1980년대 이후로 화장실문화 개선 운동이 관 주도로 펼쳐진 것은 변화의 서막이었다. 1990년대 이후로 지방자치단체와 민간단체들이 나서 ‘아름다운 화장실’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했다. 이로써 지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악취와 오물의 대명사로 외국관광객들의 원성을 샀던 한국의 화장실은 쾌적한 배설공간으로서 뿐 만 아니라 독서와 음악·미술감상을 겸한 사색, 휴식의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밖에서 놀다가도 용변은 꼭 집에서 = 한국의 화장실은 인분을 모아서 농사에 활용하는 분양법(糞壤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연히 잿간 형태의 화장실이 발전했다. 극히 최근까지도 농촌 지역의 사람들이 용변은 꼭 집에서 보려고 한 것은 이런 전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등지에 남아 있는 똥돼지 변소도 같은 맥락이다.

청동기시대에 요강이 처음 만들어져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제의 요강이 출토된 적이 있다. 요강은 형태가 변화하면서 1960~1970년대까지 혼수품으로 선호했으나, 현재는 일반 가정에서 거의 쓰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화장실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조선시대엔 궁중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은 궁중에서 요강에 담긴 오줌으로 임금의 건강상태를 점검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 후기 이후 양반가를 중심으로 타원형의 구멍을 만들어 변을 보는 형태가 등장했다.

한국의 사찰에서는 민간에서 측간, 뒷간으로 불렸던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고 부름으로써 그 격을 높였다. 근심을 풀고 명상을 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이는 화장실을 휴식공간으로 여기는 현재의 화장실문화운동과도 맥을 함께 한다.

▲처갓집과 변소는 멀수록 좋다? = 조의현 한국화장실연구소장에 따르면, 일제시대에 일부 상류계층이 이른바 ‘문화주택’을 지으면서 처음으로 집안에 화장실을 들였다고 한다. 그 후 수세식 변기의 구체적 형태, 즉 쪼그리고 앉는 동양식 변기가 반도호텔과 화신백화점 등 일부 특수 건물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대한 명칭도 뒷간, 측간에서 변소로 바뀌었다. 오늘날 일반화하고 있는 세면기, 욕실, 변기로 구성된 화장실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2년 마포 아파트에서였다. 그러나 1960년대 대부분의 일반 주택은 마당의 한구석에 자리한 수거식 화장실 형태였다. 도시 서민들은 산꼭대기에 달동네를 형성, 마을 공동 화장실을 이용했다. 달동네 화장실 앞에 아침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장면은 예사로운 풍경이었다. 도시건, 농촌이건 어린이들이 ‘변소’에 빠져 죽는 사건이 드물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표준주택 시스템을 도입, 농촌에서도 화장실을 실내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화장실은 냄새가 지독한 더러운 곳이니 멀리 있는 것이 좋다는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에 일부 지자체가 화장실 개선운동을 벌일 때, 왜 쓸 데 없는 일에 예산을 낭비하느냐는 비난을 들어야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진짜 ‘화장실’로” =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는 한국 화장실 문화의 변혁을 이끌었다. 정부가 나서 화장실 청결, 개선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서울시내 대형 숙박 위생업소의 화장실이 대부분 수세식으로 전환됐다. ‘괴담’이 나올 정도로 으스스했던 전국 초·중·고 화장실도 1986년에 모두 수세식으로 바뀌었다. 서울시는 일반 가정이 화장실을 개량했을 때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로써 1985년에 37.8%였던 전국 수세식 화장실 비율은 1989년에 61%로 급증했다. ‘변소(便所)’보다 ‘화장실(化粧室)’이라는 말이 더 널리 쓰이게 된 시기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민간단체가 중앙정부와 더불어 화장실문화 운동을 전개했다.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회의, 2001년 한국방문의 해와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준비하면서 화장실협회와 화장실문화시민연대 등의 민간단체가 등장, 범국민적 운동을 펼쳤다. 월드컵을 개최한 수원시는 1997년부터 ‘아름다운 화장실’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주목을 받았고, 각 지자체들은 경쟁적으로 화장실 문화운동에 나섰다. 이에 따라 청결할 뿐 아니라 개성적인 미관을 자랑하는 공중화장실이 속속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한국 화장실문화의 제2변혁기로 본다.

이제 전 세계가 한국의 화장실문화의 혁명적 변모를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AP통신과 이타르타스 통신이 ‘한국이 화장실 혁명을 이끈다(South Korean Leads Restroom Revolution)’는 제목의 뉴스를 타전했을 때 전 세계 70여개 언론이 동시에 보도했다. 2008년 올림픽을 개최하는 중국 등 국제대회를 유치한 국가들은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 관계자들을 한국에 파견하고 있다. 2004년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하면서 화장실은 21세기 문화를 이끄는 첨단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공공기관은 화장실에 유아용 거치대와 지저귀 교환대, 비데 등을 경쟁적으로 설치하고 있다. 또 음악을 듣고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문화 화장실’, 통풍·자연발효 시스템을 갖춘 ‘친환경 화장실’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 화장실문화운동의 성공 경험을 전 세계와 공유하기 위해 올 11월 세계화장실협회(WTA) 창립총회를 서울에서 연다. 총회 조직위 관계자는 “창립대회를 개최하는 국가답게 앞으로 더 발전된 화장실문화를 가꿔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